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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사부곡

 가을빛이 선연해질 즈음이면 김제 백산집이 떠오르곤 한다.  유년시절의 만경이 흑백 영상으로 남아있다면 김제 백산 교회는 맑은 수채화를 담고 있다.  해마다 서늘한 가을 공기가 감돌면 백산 교회 주변은 참으로 고즈넉한 풍정을 담고 있다.  화단 옆 수돗가에 드문드문 서있는 댑싸리의 여린 초록빛이 그리 고울 수가 없다.  단아한 자태를 깊은 가을까지 흩뜨리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은 사람의 격을 연상하게 하는 풀이다.  담벼락 가까이엔 가을 국화가 다복다복 뭉텅이로 피어 향을 뿜어냈다.
진홍빛 꽃잎은 유난히 선명하였고 따사로운 가을 햇살 아래 국화꽃을 넘나드는 꿀벌들의 닝닝대는 소리는 한층 오후의 정적을 자아냈다.  가을 잠자리가 빨랫줄에 사뿐 앉아있고 어머니는 한가로이 국화가 있는 마당을 지나셨다.  댑싸리나 국화는 봄에 아버지가 옮겨 놓으셨는데 댑싸리는 특히 좋아하는 식물이었다.  파란 무늬가 새겨진 열 두자 연탄 방은 늘 따스하였고 아버지는 돋보기를 쓰고 성경을 묵독하셨다.  파리채는 언제나 제자리에 놓여 있었고 어머니는 꿈결에도 ‘내 주를 가까이’를 부르셨다.  화사한 가을 빛살이 툇마루에 내려앉는 한낮이면 이따금 뒷산에서 낮꿩이 꺽꺽대며 울었다.  교회 골목길에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평화롭게 퍼질 즈음이면 절뚝거리는 용석이 소리도 묻혀 왔다.  아무도 용석이의 소리에 개의치 않았지만 어린 아이와 같은 천연함이 묻어 있었다.  꼬장꼬장한 차덕배기 집사님과 그림자처럼 아버지를 따르셨던 김덕자 집사님도 가족과 같았다.  백산의 정적은 나에게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교회 뒷담 너머에는 생건리와 부신으로 가는 길이 펼쳐 있는데 부신으로 가는 가을 길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는 길이었다. 낮은 산자락 사이를 지나는 빨간 황톳길은 알 수도 없는 동화의 나라에 이르는 길이었다.  파란 하늘에 점묘하듯 셀 수도 없는 코스모스 꽃잎이 하늘거렸고 잔솔밭 지나 부신 가는 중간쯤에는 은사시나무가 농수로 가에 드문드문 서있었다.  은사시는 실바람이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수 천 수 만개의 잎을 팔락거렸다.  빛살을 되 내쏘이는 앞면과 표백된 뒷면이 교차하면서 무수한 이파리들이 파르르 손사래를 쳤는데 그 때마다 길을 걷는 나는 알 수도 없는 그리움이 목젖까지 차오르곤 했다.  생건리로 가는 길목엔 해거름의 억새가 꽃으로 산야를 쳤다.  땅거미에 발목이 물릴 즈음이면 억새의 수런거림은 잦아들고 어둑신한 고요가 물밀어 오면 한 집 건너 꽃등이 올라 왔다.  그야말로 길 떠난 소녀같이 하얗게 밤을 세운 길래, 길순이, 상철이, 남순이가 살던 생건리며 모두 아버지가 가슴 속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이었다.
 
 내 젋은 날의 실루엣은 불투명한 음영으로 얼룩진 한 장의 비천한 종이쪽이었다.  빛과 어두움,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세계를 드나들었다.  따스한 방에서 어두운 골목을 꿈꾸었고 어두운 골목에 들면 금방 따스한 방으로 회귀하곤 했다.  열등감이 신열처럼 피어올랐고 정체성을 자문하며 자아의 세계를 헤엄쳐 갔다.  불안한 자의식은 빛과 어두움의 경계를 넘나들게 했으며 댓가는 온통 아버지가 지게 하였다.  아버지가 지신 당혹감을 생각하면 천둥벌거숭이 같은 나를 지금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내면에 남아있는 지악스러움 덕분이었던지 교육 대학 합격은 불확실한 미래에 던져 준 한 가닥 빛이었다.
그리고 그 것은 단 한 번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속죄였을 것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양수리 두물머리 강물이 은빛으로 일렁인다.  나는 선생이 되었고 도하 돌잔치에 오신 아버지는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듯 한데 속내를 내 놓진 않으셨다.  얼핏 쇠잔한 아버지의 손등이 눈에 잡혔다.  눈부신 가을 빛살이 알싸한 내 눈가를 훔치고 지나갔다.  아버지는 견고한 기도를 주시고는 아브라함처럼 김제로 발길을 놓으셨다.
 
 비보를 안고 고향으로 향하는 가슴은 다만 먹먹할 뿐이었다.  두 분이 꿈을 꾸듯 야곱처럼 누워 계셨다. 차디 찬 손이 가슴을 에우고 지나갔다.  두 손을 뻗어 아버지의 손을 그러쥐었다.  방에서 마당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상들을 정갈하게 맞추어 놓으시던 손이었다.  손이 부지런하면 사람이 부지런한 이치와 같은 것이었다.  새벽 기도에 다녀오시고 불덩이 같은 이마를 식혀 주던 손이었다.  恨이 주는 낱말의 의미가 벼락처럼 나를 때렸다. 
 
 종종 프로스트의 시처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연민은 청춘 속으로 나를 되짚어 가도록 했다.  선생이라는 궤적을 때때로 미심쩍어 하였던 까닭은 택하지 않았던 목회자의 길에 대한 연연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원의 장미를 바라보면서 ‘나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 나와 같이 살고 있어’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글을 읽으면서 사랑이라는 빛깔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했던게, 아마 스물 몇 살 때였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셨고 아버지는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 보셨다.  오랜 세월동안 ‘나에겐 나를 이해하려는 아버지가 계셨어. 그런데 그 아버지는 지금 만날 수 가 없어’ 라는 생각에 이르면 미어지는 회한이 나를 아프게 하였다.  한 인간에 대하여 사랑한다는 것과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은 어떤 차이가 나는걸까?  아무튼 아버지가 감내 하셔야 했던 그 혹독한 ‘당혹감’과 깊은 눈으로 아들을 이해하려 하셨다는 점에서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더 담았고 제목을 思父曲으로 올렸다.  24년 전 일이니 살아 계셨으면 올해로 100세인데 덧없는 세월이다.
 
 추도 날짜가 다가올 때면, 거울 속에 나타나는 슬픈 사람의 뒷모습처럼 부끄러운 참회록을 나도 쓰게 된다. 
윤동주 시인처럼.
 
2010년 10월 22일 초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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