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쓰는 편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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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영철
오늘은 가지 않은 산길을 걸었다
겨울빛이 여리고 바람끝은 맵지만 싸아한 공기는 가슴까지 씻어준다
논둑 억새들이 꽃으로 서서 흔들리고 산 아래 엎어진 지붕들은 왠지 스산하다
계절이 깊어진 터일 것이다
굽돌아진 산길엔 몇몇 소나무가 고적하게 서 있더라
그 고적을 걸어가면서 숙소를 떠난 어떤 부부를 생각해 보았지
아니 부부라기보다는 아픈 남편을 바라보는 그 집 안해가 떠 올려졌다
스틸사진 같은 그 집 안해
열흘 정도 지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을 것이다
병든 짝꿍의 한 그림자도 놓치지 않는,
쉴 새 없이 올려다 보는
그래서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응원의 눈빛이
찰칵 찍혔다
집약되어 있는 눈빛을 보았지
겨울을 넘기기 어렵다는 청천벽력을 저렇게 견뎌 왔을 것이다
예쁠 것도 없고 사철 발 벗은 그 안해처럼 저렇게 눈물을 막아 왔을 것이다
예의 그 따스한 저녁 식탁에서 나는 누가 먼저 좋아했느냐고 물었지
제가 찍었죠 결혼 했느냐고 물었고요 여친이 있느냐고 물었지요
오십 평생을 한 달음으로 달려 온 그 안해
말 끝이 흐려져서
나도 흐려지고 말았단다
2022. 12.
곡 해바라기 OST